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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역사

군산개항 117주년

NSP통신, 김광석 기자, 2016-06-24 21:32 KRD2
#군산시 #군산항 #탁류 #새만금 #아시아 허브

‘자주적 개항’에서 일제 미곡수달 전진기지로 전락..한적한 호변촌락에서 호남 최고 도시로 번영 구가

NSP통신

(전북=NSP통신) 김광석 기자 =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도로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도처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열하였으니…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군산개항사 중>

백제시대에는 기벌포, 고려시대 때는 진포라 불렸던 금강 하구. 갈대로 뒤덮인 작은 포구에 19세기 말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열강의 침탈과 일제강점기에 걸친 반세기 동안 민족의 아픔을 등에 지고 호남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117년 전 군산항 개항이다.

군산이 개항된 것은 1989년 5월 1일. 19세기 끝자락을 잡고 20세기 벽두를 연 말 그대로 세기적 전환기였다. 시대상황 또한 500년 왕업의 조선이 외세의 침탈에 맞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자주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쳤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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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국권상실과 미곡수탈의 아픔을 뒤로 하면 군산의 개항은 군산은 물론이고 전북 전역에 근대화의 회오리를 몰고 온 일대 사건이었다. 군산항을 통해 밀려든 신문명의 물결이 경제·사회·문화 등 전 사회에 걸쳐 새로운 사조의 불씨를 지폈다.

출발은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항

군산항 개항의 출발은 자주적 개항이었다. 1898년 5월 26일 외부대신 조병직이 “항시(港市) 개설은 상업을 확장해 민국(民國)의 이익을 발달케 한다”며 군산·마산·성진 등 3개 항 개항의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의정부가 회의를 거쳐 찬성 7표, 반대 3표로 의결하니 고종이 “다수에 따라 시행하라”고 재가했다. 여기에 독립협회의 자유무역주의에 입각한 개항 운동이 군산항 개항을 촉진했다.

이후 지체되던 군산항 개항은 대한제국 의정부가 열강들의 구체적인 후속조치 요구를 수용해 1899년 3월 20일 5월 1일로 개항 일자를 잡았다.

NSP통신-군산항 개항 직후.
군산항 개항 직후.

개항 일자가 결정되자 대역사가 전개됐다. 세관이 먼저 들어선 가운데 해안매립과 항만축조 공사가 진행됐다. 또 일본식 격자형 도로가 개설돼 그 중심지에 본정통이 들어서고 조차지가 조성됐다. 외국 차관에 대한 이자 납부 능력도 없었던 대한제국은 개항을 위해 천문학적인 일제 자본을 조달했다.

이 때 일제는 대한제국으로부터 평당 30전에 땅을 불하받았는데, 당시 눈깔사탕 1개 값이 1전이었으니 말 그대로 ‘사탕발림’이었다.

눈깔사탕 30개에 1평 불하

개항을 통해 해외무역을 촉진해 관세 수입을 늘리려던 대한제국의 계획은 공허한 꿈으로 끝났다. 오히려 나날이 국력이 쇠약해져 을사조약으로 사실상 일제에 예속되고 급기야 국권상실의 경술국치를 맞게 됐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의 아픔에 아랑곳없이 군산은 일제강점기 들어 미곡 수탈기지로 번영을 구가하며 흥청거렸다. 1925년 어용학자들이 펴낸 ‘군산개항사’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세관 옥상에도, 부두에도, 도로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도처에 수백 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렬하였으니…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들을 군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한 교통망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1907년 항만이 축조된 후 1908년엔 최초의 포장도로인 전주-군산 간 전군가도, 1912년엔 익산-군산 간 철도가 들어섰다.

도로와 철도, 우마차를 통해 군산항으로 들어온 쌀들을 일제는 4개의 부잔교에 3000톤급 선박 6척을 동시에 접안해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NSP통신-1920년대 군산내항 전경.
1920년대 군산내항 전경.

군산의 도로는 주변 평야지대로부터 쌀을 끌어 모으기 위해 군산역과 군산항 주변으로 집결되었다. 지금의 중앙로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장미동과 영화동에는 군산세관, 조선은행 군산지점,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시청 제 3청사 등 관청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 조선 농민들에게 고리채를 놓았다. 중앙로 동쪽 군산역과 군산항 사이에는 운반된 미곡을 가공하기 위한 정미소와 이를 지원하는 금융시설인 미곡조합 등이 밀집해서 들어섰다.

드넓은 호남평야로부터 수확된 쌀이 집산되고 가공돼 일본으로 송출되면서 여러 금융조합을 통해 돈으로 환산돼 거리로 흘러들었다.

정미소는 역시 당시 군산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시설의 하나로 일본인 농장주 소유의 창고시설과 함께 군산의 경관과 쌀 수탈의 역사성을 특징지어주었다.

3000톤급 선박 6척 동시 접안

민족의 상처가 커질수록 더욱 호황을 누린 군산의 번영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개항 당시 군산의 거주 인구는 일본인 77명을 포함해 588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경술국치의 1910년엔 조선인 3830명과 일본인 3448명 등 7373명, 다시 1920년 조선인 8243명과 일본인 5659명 등 1만4138명, 1937년 조선인 3만2399명과 일본인 1만255명등 4만2851명, 1942년 조선인 4만6959명과 일본인 8624명 등 5만6036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무역액도 급격하게 증가해 개항 당시 1만2000원에서 1934년 7400여만 원으로 6159배나 신장됐다.

수출 상품은 쌀이 거의 단일 품목이었다. 전체 수출액의 95%를 쌀이 차지하는 가운데 1909년 조선의 전체 쌀 수출량의 32.4%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제의 미곡수탈이 절정에 달했던 1934년에는 조선에서 생산된 1672만석 가운데 53.3%인 891만석이 일본으로 송출되었다. 그중 호남평야에서 생산돼 군산항을 통해 빠져나간 쌀은 300만석 이상이었다.

NSP통신-1920년대 군산.
1920년대 군산.

사람과 돈이 몰려들자 군산은 밤낮 없이 흥청거렸다. 유곽과 공창이 들어서고 음식점이 서울 못지않게 성업을 이뤘다.

미두시장의 투기도 극성을 부렸다. 일제가 재래시장 중심의 쌀 거래를 통제하기 위해 민관합작회사로 설립케 한 미두취인소를 통해 시세차익을 노리려는 투기꾼들이 부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화투는 백석지기 노름이요, 미두는 만석지기 노름’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채만식은 소설 ‘탁류’에서 이 시절의 군산을 ‘도박꾼의 공동조계요, 모나코의 도박도시인 몬테 가를로’로 비유했다.

노형석 역시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에서 ‘논, 밭, 집을 저당 잡히고 미곡 투기놀음에 골몰하는 조선의 미두꾼과 고리대로 한몫 보려는 일본 정상배, 낭인들이 몰려들어 그 자체로 범죄와 모략, 궁핍이 뒤섞인 인간 탁류의 도가니를 이루었다’고 당시 군산 시가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민족의 아픔 뒤에서 투기로 흥청

일제의 미곡수탈 정책에 편승해 약삭빠른 소수는 거액을 챙겼지만 대다수인 민중은 계량하기 힘든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1926년 말 30정보 이상의 규모를 가진 일본인 농장수는 전북이 가장 많았다. 그만큼 많은 자영농들은 소작으로 전락했다. 1916년 53%였던 소작농이 1930년 87%로 급증했다.

농지의 상실은 살인적인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1935년 군산 주민의 60% 이상이 보리가 여물기도 전에 곡식이 떨어지는 춘궁 농가였다. 굶어 죽는 사람이 514명에 달했다.

고통을 겪기는 일본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서 들여온 쌀로 인해 가격이 떨어지자 쌀 수입 반대 시위에 나섰다.

117년 전 군산개항은 오늘날 역사의 화두로 다가오고 있다. 수탈과 인명의 대가로 들어선 구조물들이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 모으고 있다. 아픈 역사의 생채기의 위에서 ‘희망의 땅’으로 부상하는 군산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인 새만금 간척사업을 발판 삼아 바야흐로 서해안의 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있다. 군산 신시도에서 김제를 거쳐 부안 해창을 잇는 33km에 이르는 방조제를 쌓고 1억2000만 평의 광활한 간척지를 개척해 관광산업과 첨단산업을 통한 아시아 허브를 꿈꾸고 있다.

세월과 함께 참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참이 되는 ‘역사의 변증법’이다.

NSP통신-현재의 군산외항.
현재의 군산외항.

NSP통신/NSP TV 김광석 기자, nspks@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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