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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면희 칼럼

역사법칙 속의 트럼프일 뿐

NSP통신, NSP인사 기자, 2016-11-11 17:52 KR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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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통신-한면희(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초빙교수) (사진 = 공동선정책연구소)
한면희(공동선정책연구소 대표, 성균관대 초빙교수) (사진 = 공동선정책연구소)

(서울=NSP통신)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 즉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역사법칙이 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자연의 이치를 이렇게 풀어냈는데, 해가 중천에 뜨면 지기 시작하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과 같다.

인간사와 자연의 이치가 닮아 있어서 인간이 순리에 따르면 더디더라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반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하기를 반복하면, 잠시 성취한 것 같지만 끝내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박근혜정부가 국가 운영의 법도 어기기를 지속한 결과 국민적 무장해제라는 역풍을 받는 지경에 이른 것도 같은 이치다.

2016년도는 세계사적으로 곡절을 참으로 많이 겪는 한 해인 것 같다. 6월에는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는 국민투표가 가결되더니, 11월에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정치적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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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인격적 결격 사유를 가장 많이 보유한 대통령 후보였다.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려는 백인 우월주의자인 만큼 인종과 성, 민족 차별을 다반사로 행한 인물이면서 성깔도 더러운 사람이다. 오죽하면 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문화계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그 저질의 변덕스러움에 등을 돌렸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줄곧 열세였지만 실제 개표에서는 당선으로 기염을 토했으니 말이다. 여기에는 필경 숨은 곡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 사는 사회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는 생태적 필요에 따른 생존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존재로서 갖는 존엄한 가치다. 전자에 의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가 운영되고, 후자에 의해 공동체의 도덕적 이상을 지향한다. 문제는 사뭇 대조적일 수 있는 양자를 조율해야 할 과제가 정치에 있는데, 그것이 제 기능을 못할 때 사단이 난다는 점이다.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를 단행한 데는 사회적 생존의 욕구가 우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세계화에 따른 시장개방으로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은 선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사회문제 발생이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이민자로 인해 내부 일자리가 현저히 줄어드는 데 따른 거부감이 있었고, 이민자에게 묻어온 이슬람교가 개개인의 소외감을 틈타 분노형 테러로 폭발하는 것을 우려했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 시민들에게서도 유사한 징후를 살필 수 있다. 위대한 아메리카의 건설과 같은 구호는 피부에 덜 와 닿을 것이다. 중남미 히스패닉계의 대거 유입과 중국산 값싼 제품의 범람 등이 내부 산업의 일자리를 위축시키는 데 따른 불만이 적지 않았다고 보인다. 9.11테러를 겪은 악몽이 존속하는 상태에서 이슬람권 이민자 유입도 경계 대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시민을 두 시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의 시각으로 평가할 때 브렉시트와 트럼프 지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동안 제국으로서 그 많은 부와 권한을 누렸으면서 사회적 약자를 품지 못하는 도량을 가졌느냐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 비판은 적지 않게 온당하다. 다만 필자는 이 시각으로만 재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시각, 즉 사회적 생존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누구나 일을 통해 얻는 대가로 생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감을 갖는다. 이것을 박탈당하거나 그럴 한계적 위험에 놓여 있다면, 이것보다 우선하는 사안은 없다. 사회적으로 버젓한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이런 고초를 겪고 있지 않으므로 혹시라도 남의 일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갈등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원후 7세기에 구체화된 이슬람교가 기독교의 본질인 성자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는 내용을 교리의 핵심으로 갖추고 있으므로 기독교도가 그것에 유독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 상존하는 생존 및 종교적 갈등의 문제를 현실 정치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주류의 정치인들은 신자유주의를 통한 무역시장 개방과 시장 활성화에 열을 올리거나 아니면 증세를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정부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데 주된 관심을 가짐으로써 결국 부자와 기득권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사회의 기초적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오랜 동안 방치될 경우 마침내 기존질서는 수명을 다하여 내리막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역사법칙이다. 다만 누가 시대정신의 흐름을 꿰뚫어보면서 이를 새롭게 이끄느냐에 따라 그 명운도 결정될 것이다.

트럼프는 돈과 더불어 대중의 기호를 냄새 맡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기존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을 서리라는 것은 분명한데, 문제는 잘못 이끌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데 있다. 그는 전형적인 파퓰리즘 정치인으로서 선동가일 뿐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역사법칙 속에서 기존질서를 해체하는 한시적 역할을 담당하는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향후 미 대통령 트럼프의 행보로 인해 초래될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역사를 새롭게 쓸 창조적 소수자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새 흐름을 건강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 요청된다. 역사는 서민의 생존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도덕적 이상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창조적 소수자의 역할은 한 개인이 아니라 자각한 집단지성이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우리가 세상을 바르게 바꾸는 행보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할 때이다.

NSP통신/NSP TV people@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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