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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박정희 에세이 ‘그리운 시절’ 연재, ‘야이또의 추억’ (4)

NSP통신, 안정은 기자, 2013-12-28 10:00 KRD7
#박정희 #그리운시절 #월간문학 #야이또의추억 #연재

당사는 저자의 허락을 얻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연재합니다.

NSP통신-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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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또의 추억 (후편)]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로 돌아가 부지런하셨던 두 분은 곧 남부러울 것 없을 만큼 돈을 모아 집과 전답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 부모님은 가족을 위한 새 터전을 차곡차곡 만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런 생활이 계속될 수만 있었다면 나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며 자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해방을 맞은 지 5년 만에 터진 전쟁은 막 일어서려던 나라는 물론이요 그 안에 살던 우리 가족을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말았다. 고국은 아버지에게 이 땅을 밟을 시간을 그리 많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은 사천까지 들이닥쳤고 그때부터 아버지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아버지가 차를 수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술자였던 까닭이었다. 낮에는 국군이 아버지를 데려가 고장난 차를 수리하게 했고 밤이면 북한군이 데려가 역시 고장난 차를 수리하게 했다. 선량한 양민들에게 사상을 물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죽창으로 찔러 죽이던 때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을을 지나는 것이 북한군이냐 국군이냐에 따라 목숨을 내걸고 일을 나가셔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극과 극으로 나뉜 사상의 대립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양쪽의 일을 모두 봐 줬다는 것이 알려지면 양쪽 모두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아버지가 인민군을 피해 부엌에 쌓아 둔 솔가지 밑에 숨어 계시다 때를 봐 살그머니 나오시던 것이 떠오른다. 참으로 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

그때 아버지의 친척 중에는 인민군을 대변해 마을 일을 보는 분이 계셨다. 아저씨뻘 되는 분이셨는데 역시 인민군의 위협에 떠밀려 붉은 완장을 차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국군의 차량을 수리해 줬다는 것을 안 아저씨는 일부러 모두가 보는 곳에서 아버지의 뺨을 내려 치셨다. 또 한 번 그런 소문이 들린다면 가차없이 죽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저씨로서는 소문이 더 커지기 전에 자신의 선에서 수습을 하고 아버지에게는 경고를 하신 셈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깨달으셨던 것 같다. 이곳은 더 이상 아버지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서 뺨을 맞은 그날 밤, 아버지는 밤새도록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버지는 이미 뜻을 굳히신 후였고 어머니도 아버지를 말리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며칠 후 아버지께선 장에 나가 내게 줄 선물 하나를 사 오셨다. 빨강 파랑 줄이 그어진 내복 한 벌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 내복을 입혀 주시며 말씀하셨다.

“정희야,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그토록 긴 이별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어린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전쟁 중이고 물자가 귀한 때라 따뜻한 새 내복을 선물 받았다는 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보송보송한 새 잠옷을 입고 나는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품에서 잠이 들었다. 남과 북을 피로 물들인 포연은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어렵고 멀기만 한 얘기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생명의 위협 속에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의 밀항을 결심하셨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뿐인 목숨을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바닷길에 맡겨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도 앞으로 나아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라면 아버지는 앞으로 나아가는 쪽을 택하셨던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던 사량도로 가신 아버지는 돛단배 한 척을 구해 당신의 손으로 직접 배를 개조하셨다. 포드차의 엔진을 뜯어 배에 다셨던 것이다. 일본에서 어렵게 배워 오신 기술 때문에 부역을 나갔다 위험에 처하고 다시 그 기술을 이용해 밀항해 목숨을 구하셨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버지는 밀항 시도 세 번째 만에 겨우 일본에 도착하실 수 있었다. 처음 두 번 모두 바다 한가운데서 엔진이 멈춰버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망망대해에서 헤매셨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갈증 때문에 바닷물까지 마시며 버틴 끝에 천만다행으로 두 번 모두 지나던 배를 만나 다시 돌아오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세 번째 시도 만에 일본 땅으로 들어가셨다. 다시는 돌아오리라 여기지 않았던 곳에 다시금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어머니는 나와 동생 원희(元熙)를 데리고 가까운 외가로 들어가셨다. 일본에서 귀환한 후 외가의 사정은 여러 모로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아버지는 사천에 집과 논밭을 마련해 외가식구들을 불러 내리셨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죽계 비단 직조공장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당시에는 공장에서 일할 만한 기술을 가진 이가 드물었다. 어머니가 일본에서 비슷한 일을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공장에서 어머니를 데려갔던 것이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어머니는 곧 공장 감독이 되셨다. 어머니는 그만큼 기술이 좋으셨고 또 열심히 일하셨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쉴 수 없게 만들었던 것 같다. 비록 아버지는 안 계셨지만 나는 그런 든든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몇 년을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머니마저 곧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떠날 결심을 굳히셨다.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하시는 어머니의 품 안에 나는 없었다. 당시 세 살이었던 동생 원희 뿐이었다. 나는 집안의 장남이었으므로 바다를 건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겨 대가 끊길 것을 걱정하셨던 것이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남은 나는 외가댁에 맡겨졌다. 그때 내 나이 다섯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기막힌 일이나 당시의 나는 그런 상황을 원망할 처지가 못좼다. 어리기도 어렸거니와 사방에는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 온통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뿐이었다. 똑같이 어려운 처지에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 떠나듯 나도 언젠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갈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20년 가까운 길고 길 생이별의 시작이 될 줄 꿈엔들 알았으랴.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목숨을 건 밀항길에 오르셨다. 당시 사량도에는 밀항하려는 사람들을 모아 배를 태워 보내는 조직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지 않은 돈을 받고 언제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낡은 배에다 사람들을 태워 보냈다. 한 배에 적정한 인원을 넘겨 태우는 것은 보통 일이었고 바다 한 가운데서 물이라도 차오를라 치면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어 물을 퍼내야 하는 그야말로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밀항길이었다.

사량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향하는 그 길, 나와 외조부모님이 동행했다. 그때 나는 당연히 어머니를 따라 함께 일본으로 갈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외가에 남아 외조부모님과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당연한 듯 엄마와 함께 배에 오르려는 나를 외할아버지가 잡아 세우셨다.

“안 된다, 정희야. 너는 엄마랑 가는 게 아니야.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사는 거다. 알겠니?”

물론 알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좋기는 했지만 그 정이 엄마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뿌리 치고는 앙칼지게 외쳤다.

“싫어! 엄마랑 같이 갈래요! 엄마랑 같이 아빠한테 갈 거예요!”

“아이구, 안 된다, 정희야. 안 돼. 너는 엄마랑 같이 가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않니. 너는 못 간다. 너무 위험해. 거기가 어디라고 간다는 거니, 응?”

외할머니 또한 내 손을 잡아끌어 당신의 품에 안으려 하셨다. 놀란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싫어요, 이거 놔요! 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엄마랑 갈 거예요. 엄마랑 갈 거란 말이에요! 원희도 가는데 왜 나만 못 가게 하는 거예요! 놔요!”

그런 내 모습에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으리라. 어머니는 뒤돌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엄마 등에 업힌 원희는 소리 지르는 나를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함께 나를 진정시키려 하셨지만 나는 경기를 일으킨 듯 팔다리를 내저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떠나고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한 부두에서 나는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작은 몸에서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 냈다. 하지만 배에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점점 어머니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요, 엄마! 엄마!”

어머니와 멀어지는 것에 놀란 나는 자지러지게 외쳤다.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신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시더니 무명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다시금 흐느끼기 시작하셨다. 어린 원희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따라 울기 시작했다. 한 순간 나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어머니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막혀 밀려나 버렸고 속절없이 외할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다시 돌아와야 했다. 악을 쓰며 저항하던 나는 결국 까무러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머니와 원희를 태운 배가 바다로 나간 후였다. 잠시 동안 넋이 나갔던 나는 바다로 뛰어들 듯 달려 나갔다. 마지막 순간 외할아버지가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정말 바다로 뛰어들어 어머니를 향해 헤엄쳐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온 힘을 쏟아내 기진한 나는 외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멀어지는 배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외할머니는 흰 무명손수건을 흔들며 흐느끼셨고 외할아버지 역시 딸과 손자를 태운 배가 작고 검은 점이 돼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내 작은 등을 쓸고 또 쓸어내려 주셨다.

그렇게 나를 남겨둔 채 밀항선에 오른 어머니는 차오르는 물을 바가지로 퍼내며 간신히 일본땅에 닿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고생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곳은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따뜻한 집이 아닌 오사카(大阪)의 냉랭한 오오무라 수용소였다.

밀항자들을 잡아 넣는 오오무라 수용소는 한 번 들어가면 이유 불문하고 전원 본국으로 후송되는 악명 높은 수용소였다. 어머니도 꼼짝없이 다시 돌아오실 처지에 놓이신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원희를 빼내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셨다. 변호사를 고용하고 예전 살던 곳의 주민들로부터 어머니가 그곳에 사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명을 받아 제출하셨다. 많은 돈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어머니와 원희는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시 만난 가족의 기쁨이 오죽이나 컸으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몸소 겪으신 삶의 풍파는 그 시절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애환과도 맞닿아 있다. 해방 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집 안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셨으나 전쟁이 터지고 일본에서 낳아 품에 안고 데려왔던 첫째 딸 야이꼬(八重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누님은 피난 중에 굶어 죽어 비석도 봉분도 없는 차가운 땅 아래 묻혀야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국군과 인민군들에게 차례로 불려가 부역을 하시며 목숨줄이 왔다 갔다 하셨고 다시금 일본으로의 밀항길에 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희망을 품을라치면 그 희망을 뒤덮고도 남을 만한 절망이 몰려왔고 부모님은 그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온 몸으로 삶의 풍파를 뚫고 나오셨다. 참으로 모진 인생이요 질긴 생명력이 아니겠는가.

그런 부모님 아래 태어났기 때문일까.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홀로 남았지만 나는 나름의 의지를 품고 내게 주어진 삶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나의 곁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계셨다. 어린 시절 친구처럼 달고 다녔던 외로움을 보듬어 주시고 한없는 애정과 사랑을 쏟아 나를 키워주신 그 분들이.


다음편에서 계속...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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