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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복의 ‘살아있으라 사랑하라’(1)

기획영상연재 베트남(1996년)

NSP통신, 강혜진 인턴기자, 2012-04-26 19:24 KR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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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부대의 추억이 담긴 ‘닌호아’ 지역, 가슴 설레는 ‘미스사이공’과의 만남

NSP통신-오지탐험가이자 기업인 도용복 회장
오지탐험가이자 기업인 도용복 회장

[부산=NSP통신] 강혜진 인턴기자 = 세계 4대 뮤지컬의 하나인 ‘미스 사이공’은 다른 뮤지컬과는 다르게 내게는 아주 의미가 깊다. 배경이 되는 베트남이 내가 해외로 나간 첫 기착지였고, 당시 나 역시 극 중 남자주인공인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월남전 파병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갓 스물을 넘어 군에 입대했던 나는 1966년 9월, 백마부대의 창설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먼저 파병되었던 맹호부대와는 달리 우리 부대가 주둔한 ‘나트랑’ 지역은 베트콩(당시 베트남의 공산당소속 군인)과의 접전지역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장의 기운이 감도는 곳으로 나트랑 해안지역에 도착한 배는 부두에 정박하지 못하고 사람 목이 잠길 만한 깊이의 바닷물에 그냥 잠겨 있어야 했다. 소총이 물에 젖으면 안 되었기에 머리 위로 팔을 치켜들고, 육지까지 흠뻑 젖은 채 바닷물 속을 걸어서 이동했다. 군용트럭이 오자 군인들은 빽빽이 차에 실려 주둔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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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트럭이 밀림으로 접어들고 긴장이 어느 정도 가실 때쯤 뒤를 따라 오던 트럭이 큰 폭발음과 함께 튀어올랐다. 베트콩의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배를 같이 타고 왔던 동지들의 시체가 하늘로 튀어오르고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혼돈과 공포.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동료를 찾으려 주변을 뒤지며 쫓아다니자 선두차량의 중대장이 이동을 위해 탑승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베트콩의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현장에서 죽은 병사를 수습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는 커녕 군번줄만 챙겨오기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상륙한 지 하루도 안 돼 주검으로 변해가는 전우들을 보며 ‘정말 죽음의 땅으로 들어왔구나’, ‘살아 돌아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의무병 보직이었던 나는 나트랑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닌호아’지역의 수송대에 파견되었다. 의무병은 1개 부대에 2명씩 내보냈는데, 보통 1명은 작전에 투입되고 나머지 1명은 부대에 남아 대민지원을 담당했다. 닌호아 부대는 인근 마을과 가까이 있어 전쟁으로 고통 받는 베트남 주민들에 대한 지원도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 해도, 주민들 중 누가 베트콩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독이 들어 마실 수 없고, 시장에 파는 수박조차 사먹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천성이 부지런한 탓에 주민들을 치료해주는 대민지원에 적극 임할 수 있었고, 부상으로 고통받는 베트남사람들 역시 의료지원이 절실했던 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과의 간격이 점점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또한 틈나는 대로 교회에 가서 기타나 오르간을 치며 같이 노래하는 동안, 아이들이나 청년들과 좀더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지원 나가던 마을에 ‘간’(gan)이라는 열일곱 살 소녀가 있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채 10살도 안된 어린 동생을 셋이나 거느린 소녀가장이었다. 이들을 딱하게 여겨 마을로 나갈 기회가 될 때면 조금씩 모아온 보급식량을 몰래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게 고마웠던지 그들도 대민지원 때마다 일손 거든다고 법석을 떨며,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항상 해맑은 웃음을 보여 주었다.

이렇듯 조금씩 도와준 것이 어느 틈에 마을에 퍼져 주민들이 눈길도 부드럽고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전우들이 작전에 투입되고 혼자 부대를 지킬 때는 ‘간’이 몰래 부대로 찾아오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 전쟁터에 와 있는 나의 외로움과 기댈 곳 없어 힘들어하던 '간'의 마음이 잘 맞아떨어져 서로 의지하며 격려해주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웃마을로 지원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전날 저녁 ‘간’의 동생들이 부대로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위병소로 나가 아이들을 만나니 다음날 지원을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평소 지원을 나갈 때면 약간의 구호품과 의약품을 가져가는데, 내일 이것을 노린 베트콩의 탈취 계획이 잡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지 말라고 손짓발짓해가며 말렸다. 아이들 말을 백퍼센트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일정을 연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베트콩들은 내가 지나가지 않자 다른 차량을 습격해서 일대에 소규모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나에게 호의를 가진 마을 주민이 우연찮게 정보를 입수했고, ‘간’의 동생들을 통해 그 사실을 긴급히 전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도 등골이 오싹한 일이지만, 그 사건이 내게 처음으로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 것 같다. 작게나마 베푼 사랑과 호의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말이다. 적선지인(積善之人)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보통 1년 남짓하는 월남에서의 군 생활을 나는 3년 동안 하고 왔다. 꼭 ‘간’과 마을 사람들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월남을 떠나오면서 ‘간’과 꼭 다시 연락하기로 약속했지만 귀국 후 살아가기 바쁜 탓에, 그리고 그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탓에 서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미스사이공의 ‘크리스’와 ‘킴’처럼 비극적이고 애절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월남과 관계된 이야기만 나오면 ‘간’의 생각에 깊이 잠기곤 한다.

1994년 베트남에도 개방 물결이 일면서 가까이 지내던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과 사업차 베트남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혹시나 ‘간’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었지만 20년이란 세월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이젠 젊은 날의 추억으로만 남길 수밖에...

내 생애의 특별한 만남, 베트남에서의 뼈아픈 참상과 악몽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도록 해준 기분 좋은 기억들, 목숨을 구한 인연까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대작(大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스케일 면에서도 최고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추억의 앨범 같은 그리움의 작품이다.

촬영/편집 = 진종훈 기자 jin0412@nspna.com

강혜진 NSP통신 인턴기자, hjkang0710@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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