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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에세이 ‘그리운 시절’ 연재, ‘개떡 하나 고구마 한 입’ (9)

NSP통신, 안정은 기자, 2014-03-21 13:22 KRD7
#박정희 #그리운시절 #연재 #월간문학 #박정희에세이

당사는 저자의 허락을 얻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연재합니다.

NSP통신-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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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 하나 고구마 한 입]

어린 시절, 내게 삼시 세 끼를 챙겨주시던 외할머님의 손맛은 소박하면서도 시골의 맛이 물씬 나는 것이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화물트럭을 타고 삼천포 시장과 윗녘인 함양, 산청, 거창, 안의 등을 오가며 수산물과 농산물을 물물교환하며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그렇게 농산물로 바꾸고 남은 수산물은 집으로 가져와 가족들에게 먹일 맛난 음식을 해 주는데 쓰셨다. 아직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장떡이다.

장떡은 껍질 벗긴 새우와 싱싱한 홍합을 칼로 잘게 다진 것에 된장과 땡초를 넣고 넓적한 호박잎 위에 놓고 찐 밀가루떡을 이른다. 시원한 바다맛과 구수하니 발효된 땅의 맛이 결합된 여름철의 별미였다. 또한 고구마잎 무침도 자주 해 주셨는데 잎이 붙은 고구마 줄기의 껍질을 벗기고 살짝 데친 뒤 젓갈과 된장을 넣어 버무리고 식초를 한 방울 살짝 가미해 만들었다.

할머님의 손맛은 언제나 정확해 너무 맵지도 너무 짜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놀다 들어오는 여름날 저녁이면 그 정겨운 음식들은 밥상에 올라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안 그래도 뱃속이 항구 떠나는 뱃고동마냥 울려대던 나는 허겁지겁 상 앞에 앉아 그 맛난 음식을 게눈감추듯 먹어치웠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할머니만의 손맛이었다. 요즘처럼 입을 유혹하는 달콤한 것들에 둘러싸인 아이들은 그 정겹고 소박한 맛을 결코 알 수 없으리라.

음식에 얽힌 이야기 중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일이 있어 적어보려 한다.

그날은 가랑비가 내리던 일요일 오전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도 늦잠을 모르고 발딱 일어나는 것이 아이들 아니던가. 나 또한 다르지 않아 그날도 일찍부터 일어나 집 안팎을 분주히 오갔다. 여느 사내아이들처럼 짓궂고 장난기가 넘치던 나는 그날 아침 댓바람부터 할아버지께 혼쭐이 나고 말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가 소중히 기르시던 가지를 줄기에 달린 채로 한 입씩 베어 먹어 놨던 것이다. 물론 다 자란 가지에는 입도 대지 않고 내 새끼손가락만한 작은 가지들만 골라 먹긴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나 다음으로 소중히 기르시던 가지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놨으니 평소 인자하시던 할아버지에게서 불벼락이 떨어질 만도 했다. 들키지 않으려 땅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며 줄기 아래 고개를 숙이고 조심조심 베어 먹었건만 마침 밭을 둘러보러 나오신 할아버지에게 그야말로 딱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종아리에 회초리를 맞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어린 손자를 감싸주신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니 잘 한 것도 없으면서 배는 왜 또 그리 고파오던지. 철없는 나는 가지 밭 사건은 금세 잊어버리고 배가 고프다며 할머니를 졸라댔다. 잠시 생각하시던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요 앞 구멍가게에 가서 사카린이랑 소다를 사오면 개떡을 만들어 주마.”

눈이 번쩍 뜨였다.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개떡을 먹기 위해서라면 요 앞 구멍가게 아니라 건너 마을 시장까지도 다녀 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서 구멍가게로 향했다. 한 손에는 할머니가 내어주신 쌈짓돈을 꼭 쥔 채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사카린과 소다를 사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개떡 먹을 생각에 입 안에는 벌써부터 군침이 가득 돌았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든 사카린 봉지에 눈이 갔다. 여간해서는 사탕이니 캐러멜이니 하는 단 것 한 번 먹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 손에 고 달달한 사카린이 봉지채로 들려있으니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마음이 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사카린 봉지를 뜯었다. 그저 딱 한 알, 아니 딱 두 알만 먹을 요량이었다. 그리고 기대에 차서는 기세도 좋게 사카린 봉지를 열어 젖혔는데 아뿔싸,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나의 소중한 사카린을 천지사방으로 흩날려 보냈던 것이다. 사투 끝에 낚은 대어를 놓친 어부의 기분이 나와 같았을까. 함께 살던 선녀 부인이 날개옷 찾아 입고 하늘로 올라갔을 때 나무꾼의 기분이 나와 같았을까. 설사 그 둘의 마음을 다 합친다 해도 그때 내가 느꼈던 아찔함에는 못 미쳤으리라.

그렇게 내 손을 벗어난 사카린은 잔디밭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 내려 촉촉한 푸른 잔디 위를 허연 사카린이 때 모르고 내린 서리마냥 뒤덮여 있었다. 아이고 세상에.

놀라고 있을 틈이 어디 있으랴. 나는 잔디 위에 납작 엎드려 아직 녹지 않은 사카린을 다시 봉지에 담으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른 땅도 아니요 젖은 땅에 떨어진 사카린을 멀쩡하게 담아가는 것은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울상이 돼 손을 내려다보니 봉지에는 사카린이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늘 쳐다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땅을 내려다보며 두 번 쉬었다.

할머니가 개떡 만들고 남은 사카린을 어디다 두시는지 잘 봐 뒀다가 모두 잠든 깊은 밤 몰래 나와 고 달콤한 것을 입에 털어 넣겠다던 나의 야무진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다 봉지를 뜯는 건데! 시큼털털한 소다 봉지를 뜯을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나는 괜스레 죄 없는 소다를 탓하며 반만 남은 사카린 봉투를 소중히 품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사카린이라도 비에 젖지 않게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한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사카린을 반이나 날려 보낸 것처럼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할머니의 인자함은 참으로 끝이 없는 것이어서 할머니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시기는커녕 괜찮다며 나를 달래셨다. 참으로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지만 할머니는 손주의 어리광을 기꺼이 받아 주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반만 남은 사카린과 돌아오는 내내 이유 없이 내 눈총을 받은 소다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기대에 부풀어 부엌 앞을 서성이며 개떡이 쪄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할머니는 미리 빻아 놓았던 보릿가루에 사카린과 소다를 넣고 막걸리를 약간 부은 다음 울본디라는 강낭콩을 넣어 버무린 반죽을 넓적한 호박잎 위에 올려 맛나게 쪄 주셨다. 할아버지 가지농사 망치랴 사카린을 반이나 날려 보내랴 아침부터 분주하게 보낸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개떡을 두 손에 들고 후후 불어가며 맛나게 먹었다.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고 몇 걸음만 걸어 나가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때에도 나는 비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의 개떡 맛이 떠오르곤 한다. 아마 거기에는 손주의 철없는 행동을 사랑으로 감싸 주시던 외할머니의 정이 스며있기 때문이리라. 나에게 있어 소박한 개떡이란 곧 할머니의 내리사랑과도 같은 말이다.

또 하나 먹을 것에 얽힌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였다. 나는 친구인 동수, 영관이, 충선이와 함께 지게를 메고 뒷산에 올랐다. 여느 때처럼 나무를 해 오기 위해서였다. 서로에게 장난을 쳐가며 한창 산비탈을 오르는데 이게 웬일인가. 커다란 노루와 멧돼지가 차례로 눈 앞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저희들끼리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했다. 노루는 긴 다리로 험한 산길을 날듯이 뛰어갔고 고약하게 생긴 멧돼지는 어디 원수라도 갚으러 가는 것 마냥 우두두두 저돌적으로 내달렸다.

놀란 것도 잠시, 우리는 그 노루와 멧돼지를 잡아 모닥불을 피우고 노릇노릇하게 구워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면 원이 없겠노라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손에 새총이라도 쥐고 있었으면 당장에라도 노루와 멧돼지를 잡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서로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장총을 한 자루씩 쥐고 있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줄행랑을 놨을 우리들이었다. 멧돼지의 어금니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늘상 굶주려 있던 터라 상상으로나마 진수성찬을 벌이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 봤을 뿐이다. 그날 우리의 입 안으로 들어간 것은 기름이 좔좔 흐르는 멧돼지 고기가 아니라 흙 속에서 캐 내 그저 풀잎에 쓱쓱 닦았을 뿐인 고구마였다. 그것도 남이 정성들여 키워 놓은 그야말로 따로 주인이 있는 고구마였던 것이다.

나는 갈빗살을 먹겠네, 너는 다리살을 먹어라, 멧돼지고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산비탈을 계속 오르는데 마침 고기 얘기로 더욱 배가 고파진 우리들의 눈 앞에 고구마 밭이 나타났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발걸음을 딱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산 속은 고즈넉하니 우리의 뱃가죽 울리는 소리만이 고동칠 따름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구마 밭으로 달려들어 흙 밖으로 드러난 고구마 줄기를 쑤욱 잡아 당겼다. 노다지도 그런 노다지가 없었다.

어른 주먹만한 고구마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너도 하나 나도 하나. 우리는 고구마 밭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생고구마를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풀잎으로 문질렀을 뿐이라 흙이 함께 씹혔지만 물 많고 달콤한 고구마를 먹는데 그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구마가 얼마나 맛있던지 고구마 밭 주인이 다가와 우리의 뒷덜미를 잡아챌 때까지 눈치도 못 챘을 정도였다.

“요 놈들! 요 도둑놈들! 뉘 집 아들내민고!”

득달같이 외치는 고구마 밭 주인 아저씨의 고함에 우리는 뱃속으로 들어갔던 고구마가 도로 튀어나오리만치 놀라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손에 든 고구마를 놓지 않은 채 뒤돌아보니 염라대왕처럼 무서운 얼굴의 주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찐빵 사건과 고추밭 사건 때도 그랬거니와 왜 나는 이렇듯 뭣 좀 먹을라치면 현장에서 들키고 마는 것일까. 나의 박복함을 탓하는 것도 잠시, 우리 모두는 고구마 밭 주인에게 지게를 빼앗기고 말았다. 먹던 고구마를 다시 밭에 묻는 시늉까지 해가며 용서를 빌었지만 먹다 만 고구마에서 새 고구마가 날 리는 만무했다. 지게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 집안 어른께 사실을 말씀드려야만 했다. 고구마 밭 주인도 그럴 요량으로 지게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우리가 메고 갔던 지게는 너무 작아 가져가봤자 다 큰 어른인 그 주인 아저씨는 쓸 수도 없었다.

그렇게 고구마 밭 주인이 지게를 가지고 사라진 후 우리는 머리통을 한 데 모으고 한참을 고민했다. 도둑을 만나 빼앗겼다고 할까 산에서 미끄러져 구르는 통에 지게가 다 부서졌다고 할까. 그러나 지금까지 기껏 어린아이의 지게 따위나 훔쳐가는 도둑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네 명이 한꺼번에 산에서 굴러 지게가 부서졌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달리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우리는 전쟁에서 패한 병사들 마냥 어깨를 늘어뜨린 채 각자의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할머니......”

나무하러 산에 간다던 손주가 지게도 없이 빈 몸으로 내려와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자 놀란 할머니는 서둘러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잘 치던 나였지만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신 지게를 빼앗기고 온 마당에 빳빳이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리 된 이유라는 것도 주인 있는 고구마를 훔쳐 먹었기 때문 아니던가. 백 번 고개 숙여 마땅한 일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그날 무사히 지게를 찾아올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게 손자를 감싸주신 나의 외할머니 덕분이었다. 잔뜩 풀이 죽은 나의 설명을 들은 외할머니는 그길로 나의 손을 잡고 고구마 밭 주인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손자의 잘못을 대신해 고개를 숙이셨다. 나에게 다시는 고구마를 훔쳐 먹지 않겠노라는 약속도 하게 하셨다.

늙으신 외조모가 함께 왔기 때문일까. 고구마 밭 주인은 나에게 염라대왕 같은 표정을 한 번 더 지어 보인 뒤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지게 중에서 내 것을 찾아 돌려줬다. 할머니에게 얼마나 고맙고 또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나에게 이리 따뜻이 마음 써 주실 분은 오로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뿐이었다. 그렇게 지게를 되찾은 나는 소나무 가지를 한 아름 쳐 내 지게에 얹어 내려왔다. 동수, 영관이, 충선이도 부모님과 함께 고구마 밭 주인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지게를 되찾았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늘 함께 나무를 하러 뒷산에 올랐지만 다시는 고구마 밭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짓궂기는 해도 두 번씩이나 주인 있는 고구마에 손을 댈 만큼 괄괄한 녀석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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